이글루스 | 로그인
카테고리

낙서
흠내골 여우고개
라이프 로그
지도로 보는 세계 미술사
지도로 보는 세계 미술사

인간 조종법
인간 조종법

아버지의 편지
아버지의 편지

포토로그

파란여우의 포토! 포토!
이글루 파인더
태그
이지 경제민주주의 안재환 렛츠리뷰 10문10답 시국미사 이명박out 독도 소동파 북한기아 외환위기 달러폭등 김훈 분서 정선희 빈센트반고흐 TheBlueDanubeWaltz 별자리 송조영 인천공항 과학이광우병을말하다 닭대가리 오바마 시사IN 만덕 쑹쭈잉 이탁오 의료민영화 광우병 우석훈
전체보기

skin by 狂風
분서 다시 읽기 1

분서Ⅰ
이지 지음, 김혜경 옮김 / 한길사






 

이지를 연독(連讀)하고 있다. 처음에는 돌베개에서 나온『이탁오 평전-유교의 전제에 맞선 중국 사상사 최대의 이단아』‘만’ 읽을 계획이었다. 읽다보니 책 속의 책이라고 장서, 설서, 분서를 조우했다. 해서 그를 죽음으로 내몬 분서를 읽어야 이지를 읽었다고 할 수 있겠다 싶었다. 홍익출판사에서 나온 홍승직의『분서』는 만만한 책값 때문에 선택했지만 독서의 질적인 만족감에선 갈증 났다. 좋은 독서란 무엇인가를 이 때 툭 질문을 던졌다. 책을 읽는 동기부여 같은걸 의미하건대 이지를 연독하는 동기는 ‘이단아’에 관한 매혹 때문이다.『다산선생 지식경영법-정민지음, 김영사』에는 학문하는 기본자세를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강조하고 있지만 연독을 학문으로 확장할 의도도 의지도 없는 일개 독서 쾌락자 한 명에 불과한 나로서는 연관성 있는 책을 추려서 읽는 버릇이 있다. 그래야 책에 관한 기록도 남기고 기억도 남는다. 그러다 보니 16세기 중국사상을 엿보게 되는데 이르렀다. 분서를 읽으면서 주자학과 유학, 양명학, 중국전제사상, 16세기 세계 동향까지 살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발을 잘못 들여놨다고 후회도 했다. 순전히 ‘이단아’라는 한 단어 때문에 꼴린 격이다. 독서의 즐거움 자체로 만족할 뿐 더 이상 독서의 진보 따위는 고려치 않는 나에게 이지는 [독서의 즐거움]은 뼈에 이르러야 한다고 충고한다. 이런! 뱁새가 봉황 따라 모이를 쪼다가 부리를 절단낼까 두렵다.


관객 입장에서 전복은 역동적이고 재미난 쇼다. 더욱이 왕조시대의 고전이 그렇다면 드라마티컬한 상황을 기대하게 된다. 일흔 여섯 살의 노인을 감옥에서 면도칼로 목을 베어 자결하게 만든 분서는 막상 읽게 되면 고요한 물처럼 자박자박 낮고 깊게 울린다. 마치 원로원의 지혜로운 노집정관이 혈기왕성한 안토니우스 어깨를 살포시 누르고 있는 것처럼 이지의 글은 침착하다. 지배층의 통치이념인 유교를 찌르고 해부하며 주희를 독충이라 공격한 이지. 후대 사상가들로부터 기꺼이 좌파에 분류된 이지의 글은 일관된 논조를 유지한다. 극적인 삶과 최후와는 대조적인 자근자근한 글 분위기를 조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만 분서를 이리 읽었나 싶었는데 이 책의 번역자인 김혜경 교수도 이지 글의 차분함을 말한다. 유교반도(儒敎叛徒)로서의 이지는 분서를 통해 부패한 관료체제를 고발하고 공리주의를 표방했다. 이지의 사상은 좌파 양명학자이자, 지식과 사상의 통섭(統攝)을 추구했다. 사상의 절대적 권위나 한 궤적에 집착하지 않는 사상과 언론, 도덕적 자유가 정치의 근본과 학문의 근간을 이루어야 한다는 설명은 도학의 풍모를 지녔는데 이는 마흔무렵에 자신의 사상의 문(門)을 연 도가(道家)사상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번잡스러운 모임과 허명(虛名)을 물리친 이지의 은둔 지향적 성격과 딱 들어맞은 도학은 평생을 ‘형님’으로 의지한 초횡과 나눈 편지에서 해탈, 무상, 귀거래사 같은 단어를 종종 쓰고 있다. 도학+선불교의 이지 수련법은 사람이 곧 도(道)이고 도(道)가 곧 사람이라는 사람의 주체성에 도를 중심에 두고 있음을 발견한다. 아직 인간중심주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16세기 사상철학의 한계이지만 인간의 개별화를 인식하면서 도(道)의 확장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지의 도학은 의미가 있다.

거장의 이성은 접근하기 어려운 성벽처럼 냉정하고 초연한 듯 보이지만 초횡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만큼은 속앓이를 감추지 않았다. 나는 분서의 전반을 차지하는 경정향과 마음으로 의지하는 초횡, 두 상반된 인물에게 관심을 두면서 분서를 읽었다.
경정향은 친구에서 적이 된 인연이고 초횡은 경정향의 문하에 있었지만 끝까지 함께 한 인물이다. 이 책에선 먼저 읽은 홍익출판사의『분서』에서 볼 수 없던 초횡의 학문, 사상의 구체적 실체를 확인할까 싶었지만 진보적 의견을 온건하게 수렴한 초횡은 아쉽게도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아 사상적 견해는 찾을 수 없다는 책 속의 비보만 접했다.-(58쪽 주석 10) 학문의 교류를 통한 사상의 진화가 두 사람 사이에 비록 없었지만 초횡은 이지에게 Story listener(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이상의 존재였다. 피에르 쌍소는『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동문선 』에서 타인의 말을 경청해 줌으로써 그를 최고의 상태로 이끄는 '듣기'의 道를 말한다. 초횡은 이지의 학문을 끌어 올린 사상의 견인차였다. 경정향의 수제자 중 오심학(오소우, 오신읍으로 불리는)으로부터 ‘사악한 마귀 들린 올빼미, 여우’같다는 공격을 받고 용담 취불루가 공격당해서 무창으로 피신한 후 초횡에게 보낸 편지에서 “글자마다 눈물이 한 줄금씩 흘러내리는군요”-(권2 서답편, 235쪽) 라고 황망한 심정을 고백을 한다. 이처럼 정신적 지주였던 초횡임에도 이지는 분서와 장서의 검토를 부탁하지만 그것은 그냥 한 번 봐 달라는 것일 뿐 논저의 기조는 수정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99쪽) 두 사람이 사상적 충돌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초횡의 온화함이 이지의 날카로운 담대함을 포용한 결과로 본다.


유교를 지배도구로 이용하며 부패를 일삼던 관료층을 향해 거침없는 하이킥을 날렸던 이지.《고결설(高潔說)》-(권3 잡술편 367쪽)-에서 스스로 성품이 고결한 나머지 속이 좁은 위인이라고 말하면서 포용력의 부재를 인정한다.(그러면서 나중에는 자신은 '높은 곳의 봉황'이라고 자위한다) 권력과 재물에 기댄다면 그가 왕공일지라도 어울리지 않으며 선한 면모를 갖춘 자라면 노비도 가까이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이 글은 세상이 자신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것에 관한 소감을 피력한 글이다. 자신에 대한 평가가 대개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므로 신경을 쓰지 않지만-나는 너희들의 포폄(褒貶)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뻔뻔하고 당당한 자신감-진정한 지기를 만나지 못해 외롭다는 토로까지 한다. 남에게 굽힐 줄 모르고 마음에 없는 소리도 하지 않는 꼿꼿한 대나무는 부러지기 쉽다. 이런 사람은 제 마음대로 사는 듯 하여 자유분방할지 모르지만 그 삶은 외롭다. 침 뱉고 싶은 낯빛을 감추고 웃어야 하며, 욕설을 삼키며 칭찬을 일삼는 세상사에서 독야청청은 고독하다. 이지는 초횡에게 외로움을 토로하는 편지를 자주 보냈으며 그 때마다 세상에 자기를 알아주는 이가 없다고 원망까지 했다. 인간 이지는 독불장군, 고집불통, 그리고 사상의 이단아로써 외로웠다. 나는 그가 마당 쓸기를 좋아하고 빨래를 자주 하고 사위에게 장모제사까지 훈계하는 빈틈없고 꼼꼼한 장면에서 어떤 결벽증 같은 걸 느낀다. 지금 세상에는 이탁오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분통터져 하지만 16세기 왕조시대에 제도의 부정함 밖에서 신선처럼 사는 자유인을 인정할 용기 있는 사람이 흔했겠나. 


한 번도 헐렁한 일상이나 모호한 사상의 논지를 보여주지 않은 이지는 흡사 선불교의 꼬장꼬장하고 어려운 고승을 연상하게 하지만 이지는 스스로 세속적 인간임을 공공연히 천명했다. 인욕을 긍정하는 양신론을 통해 욕망도 성취하고 생명보전도 주장한 이지는 돈을 좋아했다. 중국정치는 겉으로는 대의명분과 윤리를 표방하지만 실질적인 측면을 관찰해서 보면 물질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다. 농업을 중시하지만 상업의 부흥을 끊임없이 꿈꿨다. 실사구시와도 한 맥을 소통하는 이지 사상은 유물론과 동심설(童心說), 두 개의 포인트로 압축해서 보면 이해가 쉽다. 현실의 禪은 언어라는 편리한 도구로 전해지는 메시지가 아니다. "선은 항상 삶의 가장 가운데 있는 것을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이는 지식인들이 해부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일본 禪학자인 스즈키 다이세츠의 이 말은 (물질적으로 이익을 내어)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 禪이라는 이지의 유물론과 맞닿아 있다. 禪은 리얼리티다. 유물론과 함께 동심설은 이지 사상에서 주요 아이콘이다. 본심(本心)이기도 하고, 불용이(不容已)와 밀착관계이기도 한 동심설은 분서2권까지 읽은 다음 뭔가 그림이 잡혀질 것 같다. 이 책에선 서간문과 자신의 논설문인 잡술을 수록했다. 남의 발자국을 따라가지 않아 좋아했다는 소식(소동파)처럼 이지도 시 짓기를 즐겨했다. 자연미를 상실한 문학을 비분강개하는 점은 깊이 없는 말장난으로서의 글짓기를 지적하는 것으로 그의 시가 의도적인 꾸밈이 없는 것도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김혜경 교수의 분서가 국내 최초로 완역된 덕분에 이지의 시를 다음 권에서 실컷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 또한 이지 연독의 수혜다. 다만, 성실한 역주에는 감탄하지만 말미에 실은 한문원전에 한글 음을 달아주지 않아 옥편 찾기가 어렵고, 문맥상 이해가 되지 않는 중국 고유명사의 등장으로 독서의 속도를 떨어뜨림이 아쉽다.




by bluefox | 2008/08/06 22:45 |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